감명 깊은 구절들. 일 상 다 반 사




캐스카트가 주위를 둘러싼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다.
"목소리는 숲 속의 모든 미미한 소리와 닮았지. 바람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동물의 울음소리 등 말이야. 숲 속을 헤메다 무슨 소리를 들으면 혼비백산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란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 뭔지 아니? 그건 바로 발과 눈이란다. 발은 방랑하고 일탈하고 싶은 욕망을 위해, 눈은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욕망을 위해 있는 거야. 이 두 가지가 사람을 가장 큰 혼란 속에 빠트리게 한단다. 그 가엾은 길잡이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면서 눈에서 피가 흐르고 발이 타오르는 걸 느낀 거야."

앨저넌 블랙우드, [웬디고] 116-117p






우리가 우리의 도덕을 의지할 곳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오히려 오직 물리학*이다 (그럴 필요를 느낀다면 말이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참고.

* (원자 물리학 : 기호 물리학, 공간 기호 물리학, (불연속적인), 그리고 문자 물리학)

프랑시스 퐁주, [테이블] 56p (파리 1970년 2월 15일)






그리스의 교부들이 기독론의 관점에서 구약 성서의 상 적대주의(像 敵對主義)[우상 숭배 금지]를 배격했을 때 이미 그러한 신플라톤주의적 사유 과정을 거친 듯하다. 신의 육화(肉化)에서 그들은 가시적인 현상을 근본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예술작품을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러한 상 금지(禁止)의 극복에서 기독교적 서양의 조형예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준 결정적 사건을 보게 된다.(…)

세속성을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은 기독교부터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처음으로 세계를 탈마성화(脫魔性化)함으로써,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과의 절대적인 대립 관계의 공간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구원의 약속은 세계가 아직도 다만 '이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구의 특수성은 동시에 고대 세계의 종언을 가져온 교회와 국가의 긴장 관계를 낳게 되며 그럼으로써 세속성의 개념은 원래의 현실성을 얻게 된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I], 249/265p






도스토옙스키는 신인인 그리스도처럼 테오시스의 길에 들어선 알료샤와 달리, 자신의 에고를 위해 자신의 자의지만을 신뢰하는 서구적 인간의 유형인 이반을 인신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처럼 인간 속에서 훼손된 신의 이미지를 신인처럼 원래의 순수한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의 가장 중요한 전범을 초기 그리스 교부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성용現聖容, Transfiguration'에서 찾고 있었다. 타볼 산 Mount Tabol 정상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빛에 의해 모습이 변해 얼굴은 태양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얗게 변한 그리스도의 메타모르포시스는 신성이 성령에 의해 인간 속에서 복원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현성용을 통한 그리스도의 테오시스처럼 인간 역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케노시스를 통하여 신의 이미지, 즉 보이지 않는 초월자의 이콘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신적 경륜으로서의 오이코노미아의 신비가 지상에서 실현되는 과정인 케노시스와 테오시스의 길에서 이콘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증명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 이콘을 관상함으로써 이콘을 바라보고 공경을 표시하는 사람도 케노시스와 테오시스의 길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래서 9세기의 이콘 파괴 논쟁에서 이콘 공경론을 옹호하던 테오도로스 스투디오스는 이콘을 '신적 오이코노미아'를 담고 있는 구원 계획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테오시스를 그리스-로마 신화에서와 같이 인간이 신으로 변신한다는 환상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요소에서 벗어나서 정신과 영혼의 세계로 변환되는 '메타노이아'나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되는 교제라는 의미의 '코이노이아'의 과정 가운데에서 자신의 미덕을 통해 이콘처럼 신적인 빛의 요소를 내면화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덕형, [이콘과 아방가르드] 96-98p






시간의 거대한 흐름이 군데군데 잘려나가기 시작했고, 이 시산과 저 시간이 거리낌 없이 같은 공간을 차지했다. 이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흘러간 시간 속으로, 사람들은 곳곳에서 두려움 없이 다이빙해 들어갔고, 얼마 후에는 전혀 다른 곳에서 물기를 훔치며 수면으로 떠오르고는 했다. 그리고 다시 다른 시간 속으로, 다른 강물 속으로 몸을 곧게 편 채로 뛰어들었다. 어느 도시의 한복판에는 드높은 건물들이 일제히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건물들이 뿌리를 뻗어내린 길은 꿈의 공장이라고 불려졌다. 세계는 같은 시각에, 같은 내용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아련한 추억들은 활짝 젖혀진 어느 공장에서 조금식 가공되었다. 사람들의 열광과, 환호와, ……그런…… 고대에서 전해진 매혹과, 삶과 죽음의 희비극들은 도시의 곳곳에서마다 되풀이되었고, 도시를 떠돌던 악취와 오염된 공기는 습한 극장의 구석으로 모여들었다. 일상의 뒷면에는 육화된 꿈이 고여 있었고, 사람들은 부푼 가슴을 내리누르며 일상의 뒷면을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옛날의 이야기로, 누군가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금기의 상자를 열었던 때처럼, 텅 빈, 세계를 기록한 지나간 시대의 이미 상해버린 필름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슬프고 광포한 일들이었다. 잔상들은 사람들의 시신경을 휘어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기억은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잊혀진 기억들은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무수한 기록장치의 차가운 뒷면으로 파고들어가서,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슬프고 비참한 일들이었다.

한유주, [달로] 24-25p






즉 모든 것은 속임수였고, 이 모든 것은 연극이고 불쌍한 것이었다. (…) 이것이 이곳 삶의 막다른 골목이며, 이 좁은 경계 안에서 구원을 찾을 필요는 없다. 내가 구원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실제로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물건을 최근 꿈속에서 잃어버리고 비통해하거나, 아니면 내일 그것을 찾는 꿈을 꾸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다. (…) 나는 삶이 꺾어진 곳에서, 삶이 언젠가 진짜로 살아 있고 의미 있고 거대한, 다른 무언가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던 곳에서 삶의 작은 틈을 발견했다. 그것들을 수정과 같은 의미로 채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부피가 큰 형용사가 필요할지……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혼란스러워질 테니. 고치기 어려운 이 틈에서 부패가 시작되었다. 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 꿈과 결합과 몰락에 관해서 말할 것만 같다. 아니, 다시 벗어났다. 나의 가장 좋은 단어들은 도망 중에 있기에 나팔 소리에 응답을 하지 않으며, 나머지 단어들은 불구자이다. 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게 될 줄 알았다면, A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연결된 개념들의 큰 길을 따라 도달하고 완성했을 것이고, 나의 영혼은 단어들로 에워싸여 세워졌을 텐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사형장으로의 초대] 230-231p






22 때는 겨울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예수를 둘러 싸고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25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
26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온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1 이 때에 유다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33 유다인들은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느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하고 대들었다.
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35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36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 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37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 10장 22-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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